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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백, 말 없는
침묵 속의 여기 있음
[이소영: Making a Void] 2016.12.09-12.22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다방
안소연 / 미술비평
여기 텅 빈 공간에 서서, 이소영은 공백을 말한다. 도무지 불가능한, 공백을 만들기 위한 그의 시도는 하나의 텅 빈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바디우(Alain Badiou)의 철학적 논의에 따르면, 공백은, 비어있는 것의 나타남을, 사라짐의 여기 있음을 말한다. 때문에 그가 시도하는 이 불가능한 존재로서의 공백은, 역설적이게도 존재를 증명할 공간을 필요로 한다. 되돌아보면, 그가 오랫동안 건축적 공간과 그 공간에 새겨진 부조리한 질서 및 불가능한 구조를 살펴온 것도, 지금 이 공백에 관한 물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공백이라는, 이 불가능한 존재에 대한 그의 물음은 실존하는 현실의 공간에 드러나지 않은 혹은 드러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말을 하는 것이다. 숱한 모순과 불가능을, 이를테면 사유 자체의 “잘못 말하기”를 감수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다시, 공백을 만든다는 것이 가능한가. 오래 전, 《공백 Le Vide》(1958)이라는 제목의 전시를 열었던 이브 클라인(Yves klein)은, 이어서 <허공으로 뛰어들다 Leap into the Void>(1960)라는 사진 퍼포먼스 작업에서도 “공백”을 만드는/말하는 것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전시장 내부 공간을 텅 비우고 벽 전체를 흰 색으로 칠해 놓거나, 건물 위에서 허공으로 뛰어드는 신체의 순간을 사진으로 포착하는 등 일련의 구체적인 상황을 통해 상상할 수 있는 “공백”에 대해 말하려 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소영의 <white void>(2016)와 <empty blue>(2016), <5 minutes 12 seconds term>(2016)도 “실존하는 무엇”을 통해 실존할 수 없는 “존재로서의 공백”에 다가간다. 이 행위는 일련의 실패한 상황에 도달하기를 바라는 철학적 사유가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흰 공백, 어쩌면 이 말은 공백이라는 존재의 특성을 가장 잘 담아내고 있는 특수한 형태일 수도 있다. 공백은, 공간의 타락이다. 그것은 불가능에 대한 사유이기 때문이다. 공간이 구축하고 있는 구조적 질서에서 벗어나 오히려 정반대의 불가능에 대한 가능성을, 공백은 사유한다. 바디우의 말대로, 모든 것의 사라짐에 의존하고 있는 공백은, 요컨대 “모든 것의 사라짐”으로 사유된 “여기 있음”의 역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소영의 <white void>와 <empty blue>는 사라짐을 드러나게 하는, 다시 말해서 질서 속에 자리 잡은 물리적 영역으로서의 공간을 어둠처럼 텅 빈 상태에 몰아넣고, 대신 사라짐으로 드러난 꽉 찬 공백을, 지금 여기서 사유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white void>로 혹은 <empty blue>로 보여지는 이 존재는, 공백에 관한 또 다른 익명의 사유체인가, 아니면 공백에 관해 이미 과도하게 묘사된 하나의 기술(記述)일 뿐인가. 번번이, 공백의 차원을 사유하는 예술적 형태들은, 그 경계의 주변을 아슬아슬 맴도는 듯하다.
한편, <5 minutes 12 seconds term>은 시간의 공백을 가늠한다. 침묵으로 가득한 텅 빈 공간 속에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외마디의 목소리는, 역설적이게도 반복되는 소리와 소리 사이, 즉 5분 12초 간의 침묵을 드러내주는 하나의 표시로 작용한다. 고정된 이름도 형태도 없는 임의의 5분 12초는, 사실상 그 어떤 이름과 형태도 남아낼 수 있는 시간의 공백이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그 시간의 공백 또한 공간 속에서 시간의 노릇을 함으로써 무한한 형태를 구축해 낼 수 있다. 이처럼 《Making a Void》로 엮이는 일련의 작업들은, 기존의 작업으로부터 조금 비껴선(사실, 기존 작업의 구조 속으로 들어갔다는 표현이 적합할 수도 있지만) 위치에서, 그간 작가가 지속해 온 공간에 대한 사유를 더욱 확장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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